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랑고바르드 왕국 (문단 편집) === 라벤나 정복, 그러나... === 744년 1월, 랑고바르드 왕국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군림하며(32년)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리우프란트]] 왕이 사망했다. 사후 조카 '''[[힐데프란트]]'''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동로마 제국과 교황에 대한 전쟁을 중지하고 평화를 회복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해 8월 프리올리 공작 '''[[라치스]]'''를 앞세운 반란군에 의해 폐위되었다. 라치스는 자신을 리우프란트 왕의 진정한 상속자이자 정책을 이어받을 계승자라고 내세웠다. 또한 왕실과 공작에 해를 끼치는 불복종과 간첩 행위를 억제하려는 노력을 소홀히 한 판사를 잔혹한 방식으로 처형하는 등 일련의 법을 제정해 자신의 집권에 반대하는 이들의 봉기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했다. 또한 라틴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라틴 여인 타시아와 결혼했고, 전통적인 랑고바르드 의식이 아닌 로마 의식에 따라 결혼식을 거행했다. 그리고 746년부터 랑고바르드 왕의 칭호 대신 '프린켑스' 칭호를 내세웠다. 그러나 이같은 친로마 정책에 많은 랑고바르드 귀족들이 반감을 품었고, 왕이 로마 교황과 동로마 제국에 대한 평화 정책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서도 불만을 드러냈다. 그는 이들을 달래기 위해 749년 펜타폴리스를 침공하고 로마와 라벤나 총독부를 연결하는 도로의 요충지인 페루자를 포위했다. 이때 교황 [[자카리아]]가 포위를 풀어달라고 청하자, 그는 이를 받아들여 파비아로 철수했다. 749년 7월, 밀라노에 모인 랑고바르드 공작들은 라치스가 교황에게 매수되었으니 더 이상 따를 수 없다며 아이스툴프를 새 왕으로 세우기로 결의했다. 라치스는 이를 막으려 했지만 곧 온 가족과 함께 로마로 피신했다. 라치스를 몰아내고 새 왕에 옹립된 '''[[아이스툴프]]'''는 이탈리아 전체를 자신의 통치하에 두려는 야망을 품고, 이를 위한 군대의 재편과 강화에 전념했다. 모든 자유인은 군 복무 대상이 되었으며, 징병 대상자들의 경제적 자원에 상응하는 의무를 준수해야 했다. 대지주와 부유한 상인들은 흉갑과 말을 착용해야 하고, 보통 지주와 일반 상인들은 말, 방패, 창을 들고 나와야 했다. 가장 가난한 사람들은 나무 방패, 활, 화살을 장비해야 했다. 또한 [[프랑크 왕국]]의 침략을 막고자 알프스 산맥의 방어를 강화했으며, 물류 흐름을 엄격하게 통제했다. 여기에 피핀 3세의 형이며 당시 수도원에서 은퇴 생활을 하던 카를로만과 손을 잡아 피핀을 견제하게 했다. ||<-2> [[파일:907px-Aistulf's_Italy-it.svg.png|width=350]] || ||<-2> 751년 랑고바르드 왕국이 라벤나를 점령한 이후 이탈리아 반도의 모습 || ||<#B0C4DE> '''{{{#000 회색}}}''' ||랑고바르드 왕국 || ||<#FF8442> '''{{{#FFF 주황}}}''' ||동로마 제국 || 750년, [[라벤나 총독부]]를 침공한 그는 코마치오와 페레라를 공략했다. 이후 751년 여름 이스트리아를 공략한 뒤 라벤나를 포위 공격했다. [[에우티키오스]] 총독은 사력을 다해 싸우다 전사했고, 라벤나의 총독 궁전은 아이스툴프의 또다른 궁전이 되었다. 그는 승리를 기념하여 동로마 제국의 양식에 기반하여 자신의 초상화를 담은 동전을 주조했다. 752년, 교황 [[스테파노 2세]]에게 로마 공국의 각 주민과 영토에 대한 자신의 주권을 인정하라고 요구하는 서한을 보냈다. 교황이 요구를 거부하자, 그는 분견대를 잇따라 파견해 로마를 괴롭혔고 753년 체사노 요새를 함락했다. 다만 로마 시를 직접 공격하는 것은 가톨릭 군주의 입장상 부담이 컸기에 쉽사리 감행하지 않았다. 한편 751년 라치스에게 충성하던 스폴레토 공작 [[루푸스(스폴레토)|루푸스]]를 제거하고 [[스폴레토 공국]]을 직할령으로 삼았으며, 베네벤토 공국에게도 충성 서약을 다시 한 번 확보했다. 753년 10월 스테파노 2세는 아이스툴프에게 사절을 보내 빼앗아간 요새를 돌려준다면 보상금을 바치겠다고 제안했지만, 아이스툴프는 무조건 복종하라며 거부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스테파노 2세는 754년 1월 6일 [[프랑크 왕국]]으로 찾아가서 [[피핀 3세]]에게 개입을 요청했다. 일전에 교황이 [[메로빙거 왕조]]를 밀어내고 자신이 프랑크 왕이 되는 걸 용인해준 적이 있는 데다 교황이 랑고바르드 왕국의 가신이 되는 걸 막고 싶었기에, 피핀 3세는 이탈리아 문제에 개입하기로 했다. 4월 14일, 피핀은 프랑크 귀족들을 소집해 랑고바르드 왕국과의 전쟁을 지지해달라고 요청해 모두의 동의를 얻어냈다. 카를로만은 지난해에 사망했기에, 프랑크 왕국 내에서 피핀을 제지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755년 봄, 피핀 3세는 알프스 산맥으로 진입해 수사 계곡 요새에서 랑고바르드군을 상대로 심각한 패배를 안겼다. 아이스툴프는 파비아로 도망쳤지만 프랑크군에게 포위되었다. 이어진 평화 협상 끝에, 755년 6월 양자는 평화 협약을 맺었다. 아이스툴프는 랑고바르드 왕국에 대한 프랑크 왕국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인질을 넘기며, 자신이 빼앗았던 영토를 동로마 제국에 반환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피핀 3세가 철수한 후, 그는 군대를 재정비한 후 756년 1월부터 3월까지 로마 공방전을 전개했다. 알프스 산맥을 겨울에 넘는 건 거의 불가능하기에, 프랑크군이 산맥을 넘지 못하는 사이에 로마 시를 함락시켜서 모든 걸 끝내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로마 시는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에 의지하며 끝까지 저항한 수비대와 시민들 때문에 함락되지 않았고, 아이스툴프는 4월 초 포위를 풀고 파비아로 돌아갔다. 한편 피핀 3세는 아이스툴프가 약속을 어겼다는 소식을 듣고 4월에 알프스 산맥을 넘어 북이탈리아로 진군했다. 이어진 전투에서 아이스툴프를 또다시 격파하고 파비아에서 포위 공격했다. 아이스툴프는 결국 756년 6월 항복하고 훨씬 가혹한 평화 협약을 맺어야 했다. 이번에는 일전에 점령한 영토를 동로마 제국이 아니라 로마 교황의 지배 아래로 돌아가야 하고, 더 많은 인질을 프랑크 왕국에 보내야 했으며, 상당한 배상금을 프랑크 왕국에 지불해야 했다. 이리하여 교황청이 피핀 3세로부터 라벤나 총독부 등 이탈리아 중부의 땅을 기증받으면서 [[교황령]]이 탄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